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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싯 NEC 위원장, 워시 전 연준 이사 등 거론 파월 임기 남았지만 벌써 차기 의장 언급 트럼프 코드 맞추는 충성파로 대체 가능성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세계 경제 방향을 결정하는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새판짜기를 시작했다. 금리 정책을 두고 제롬 파월 의장과 대립해 온 만큼,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물을 의장 자리에 앉히기 위한 움직임으로 분석된다.
트럼프 "차기 연준 의장 후보 4명"
5일(이하 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국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파월의 후임과 관련해 “‘케빈’이라는 이름의 두 사람과 다른 두 사람”까지 총 4명의 후보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2018년 취임한 파월은 연임에 성공해 2026년 5월까지 연준을 이끌 예정이다.
트럼프는 같은 날 미국 경제 매체 CNBC '스쿼크 박스'에 출연해 4명에 대해 재차 언급했다. 그는 "케빈과 케빈, 두 케빈 모두 매우 좋다"며 "케빈 두 사람은 매우 잘하고 있고, 매우 잘하고 있는 다른 2명도 있다. 결국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4명 중 1명이 될 것"이라면서도 당장 최종 결정을 내리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크리스토퍼 월러 연준 이사가 유력한 차기 연준 의장 후보로 꼽히고 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베선트 장관은 후보가 아니라고 밝혔다. 그는 전날 밤 베선트 장관에게 직접 물어봤다며 "나는 스콧을 사랑하지만 스콧은 현재 머물고 싶어한다"고 설명했다.
파월 의장의 후임자 선정 논의는 금리인하에 반대하는 매파인 아드리아나 쿠글러(Adriana Kugler) 이사가 사임한다고 밝히며 본격화됐다. 이번 사임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해당 공석을 이용해 파월 의장의 후임자를 미리 임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작년 대선 승리 직후부터 파월 의장에게 지속적으로 금리 인하를 요구해 왔다. 하지만 연준이 작년 12월 0.25%포인트를 내린 뒤 올해 연속 금리를 동결하자 “파월은 멍청하다”, “항상 너무 늦다” 등 끊임없이 파월을 흔들고 있다. 최근에도 그는 "이번에는 후회하는 선택을 하고 싶지 않다"며 "사람들이 다 훌륭해 보여도 막상 자리에 앉히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강조했다.

‘충성파 학자’ 해싯 對 ‘연준 경력직’ 워시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인물들 중 가장 유력한 후보는 케빈 해싯(Kevin Hassett)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케빈 워시(Kevin Warsh) 전 연준 이사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이후, 워싱턴 정가와 월가는 두 인물이 가진 정책 성향과 비전에 주목했다. 먼저 해싯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 경제 정책에 대한 이해가 깊은 인물로 평가된다. 앞서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는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CEA)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해싯은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 출신이다. 오랫동안 보수 성향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AEI)에 몸담으며 감세와 규제 완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핵심 정책인 법인세 인하와 관세 정책을 담당했다. 정치 전문 매체 악시오스에 따르면 그는 해당 정책 추진 과정에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그를 신뢰하는 참모 중 한 명으로 꼽는다.
또한 해싯은 저금리 정책을 추진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와도 맞는 인물이다. 지난해 9월 연준이 한 번에 0.5%포인트 인하하는 ‘빅컷’을 단행하자 해싯은 다음 달 “연준은 가지고 있던 데이터를 기준으로 상당히 타당한 결정을 했다”고 옹호했다. 이에 해싯이 파월과는 다르게 순응적인 성향이라 트럼프의 바람대로 금리를 대폭 낮출 수도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해싯은 한때 “사람들에게 연준의 독립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상기시키는 것이 나의 임무”라면서 파월 의장을 방어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입장을 바꿨다. 그는 지난 7월 ABC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연준 의장을 해임할 권한이 있느냐”는 질문에 “사유가 있다면 대통령은 분명히 그럴 권한이 있다”고 답했다.
다만 그는 학계에서 주로 재정 및 세금 정책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중앙은행 핵심 업무인 통화정책 운영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두고, 일각에서는 “연준의 복잡한 과제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뚜렷한 보수적 정치 성향이 연준의 정치적 중립성 유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도 우려가 크다.
충성 기반 인사에 따른 정책 중립성 훼손 우려
또 다른 후보 워시 전 이사는 연준 내부 경험을 갖춘 경력직이다. 그는 2006년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 당시 35세 나이로 연준 이사에 임명돼 2011년까지 5년간 활동했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벤 버냉키 의장을 도와 위기 대응 최전선에서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한 경험이 있다. 연준을 떠난 뒤에는 스탠퍼드대 부설 보수 성향 싱크탱크 후버 연구소에서 재직했다.
워시는 트럼프 대통령이 파월을 연준 의장으로 앉힐 때 마지막까지 후보로 검토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파월을 선택했지만, 그 후에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그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는 듯한 말을 하며 워시를 칭찬하기도 했다. 실제 워시는 파월 의장이 펼치는 정책에 대해 꾸준히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는 연준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에 대한 실수를 저질렀고, 금리인하를 주저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미 공영방송 PBS에 따르면 워시는 “연준 정책 수행에 있어 ‘체제 변화(regime change)’가 필요하다”고 수차례 언급했다.
다만 그의 이러한 주장은 연준 이사 시절 행보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최근 그는 금리인하에 우호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연준 이사 시절에는 물가 안정을 우선시하는 매파적 성향을 보였다. 이 같은 입장 변화를 두고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미국 매체들은 현 경제 상황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 것인지, 아니면 트럼프 행정부와 보조를 맞추기 위한 정치적 행보인지 여러 해석을 내놓고 있다.
연준 의장이 바뀐다고 해서 연준이 내리는 주요 결정을 의장 한 사람이 독단적으로 할 수는 없다. 기준금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위원 12명이 투표해 정한다. 하지만 연준 의장은 FOMC 회의 의제를 설정하고 논의의 방향을 결정한다. 위원회를 대표하는 유일한 목소리로 시장과 직접 소통하는 막강한 영향력도 갖는다. 의장이 어떤 경제 데이터를 강조하고 어떤 정책을 우선순위에 두느냐에 따라 위원회 전체 논의와 결정이 달라질 수 있다. 결국 행정부와 정책적 코드를 맞추는 인물이 연준 수장이 되면, FOMC 내부 표결 구조와 관계없이 연준의 정책적 무게 중심이 행정부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