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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기업가치 약 42억 달러
조용한 강자에서 시장 재편 중심으로
전통 금융·가상자산 경계 흐려져

글로벌 가상자산 거래소 불리시(Bullish)가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을 추진하며 사업 확장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불리시는 상장을 통해 마련한 자금을 미국 국채에 투입하고, 이를 발판 삼아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본격 진입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기존 수수료 중심 거래소 비즈니스를 넘어 탈중앙화 인프라와 법적 안정성 기반의 디지털 금융 확장을 노리는 전략이다. 미국 내 규제 환경 변화와 함께 국채 담보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제도권 내 확장 가능성도 날도 커지는 모습이다.
‘자산 기반 신뢰도·상장사 투명성’ 두 마리 토끼
5일(현지시각)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불리시는 지난 7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기업공개(IPO) 예비신청서를 제출한 데 이어 최근 업데이트된 증권신고서를 제출했다. IPO가 승인되면, 불리시 주식은 이르면 오는 12일부터 거래를 시작하게 된다. 불리시는 이번 상장에서 42억3,000만 달러(약 5조8,000억원)의 기업 가치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1주당 28~31달러로 총 2,030만 주를 판매해 최대 6억2,900만 달러(약 9,000억원)를 유치한다는 계획이다.
자금의 핵심 활용처는 미국 국채 투자다. 불리시는 조달한 자금의 상당 부분을 미국 국채에 투입하고, 이를 담보로 한 스테이블코인 발행 및 유통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최근 미국 정부가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규제안을 제시하며 발행 기준을 명확히 한 만큼 해당 기준을 만족하는 스테이블코인 플랫폼으로 자리 잡겠다는 전략이다. 이는 곧 자산 기반의 신뢰도와 상장사의 투명성을 동시에 확보해 기관투자자들의 유입을 노리는 시도로 읽힌다.
한때 기업인수목적회사(SPAC)를 통한 우회 상장을 시도했던 불리시는 2022년 해당 계획이 최종 무산된 이후 꾸준히 직상장 준비를 이어 왔다. 당시에는 시장 신뢰와 실적 모두 부족하다는 시각이 주를 이뤘지만, 이번 상장 과정에서는 거래량과 유동성, 기술 인프라 측면에서 많은 개선을 이뤘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독립 상장을 통해 글로벌 투자자와의 접점을 확보하고, 자금 조달을 넘는 실질적 전략 전환의 계기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중장기 점유율 확대 및 인프라 전환 완료
한동안 시장 내 존재감이 크지 않았던 불리시가 분위기 반전을 이룬 것은 수수료 구조 개편과 인프라 재정비 덕분이다. 불리시는 미국 시장 내 비트코인 거래 수요 증가에 맞춰 거래 수수료를 경쟁사 대비 획기적으로 낮추는 전략을 구사했고, 이에 따라 기관투자자 이용률이 꾸준히 증가했다. 다른 대형 거래소들이 높은 수수료로 단기 수익을 극대화한 것과 달리, 불리시는 초저수수료 정책을 통해 거래량 중심의 사업모델을 정착시켰다. 이는 중장기 점유율 확대에 집중한 선택이었다.
최근에는 플랫폼 인프라 측면에서도 대대적인 전환이 이뤄졌다. 불리시는 지난 7월 자사의 거래 인프라를 전면 솔라나(SOL) 블록체인 기반으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솔라나는 이더리움 등 여타 블록체인에 비해 트랜잭션 속도가 빠르고 수수료가 저렴해 대규모 처리와 확장성이 필요한 환경에 유리한 시스템으로 평가된다. 불리시는 기존에는 프라이빗 블록체인 위주로 운영되던 시스템을 솔라나로 이전해 탈중앙성과 효율성 사이의 균형을 확보한다는 구상이다.
이는 단순한 백엔드 기술 변경을 넘어 향후 스테이블코인 운영 및 유통과 관련된 기술 인프라 재정비와도 연결된다. 이번 통합으로 불리시는 솔라나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거래 및 청산 서비스에 도입할 예정이며, 기관 대상 금융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여기에 최근 미국 내에서 스테이블코인 관련 입법이 급물살을 타는 등 규제 환경이 명확해진 점도 불리시의 움직임에 힘을 실어준다. 자체 거래소의 수익 구조에 더해 스테이블코인 유통을 통해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창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스테이블코인 향한 시장의 시선, 우려보단 기대
이처럼 가상자산 시장이 빠르게 확장되는 가운데, 미국 국채를 담보로 발행되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시장 참여자들의 관심도 눈에 띄게 증가하는 모습이다. 민간 기업이 발행하되, 기초자산을 미국 국채나 현금에 고정한 형태는 시장에서 일종의 ‘사이버 달러’로 인식되며 신뢰를 높이고 있다. 특히 대다수 기관투자자는 민감한 가격 변동성을 배제한 디지털화폐를 선호하며, 이에 따라 실물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발행량도 꾸준히 늘고 있다. 불리시가 상장과 동시에 국채 담보를 내세운 이유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암호화폐는 본질적으로 투기적 성격이 강하고, 실물경제와 유리된다는 비판론이 우세했다. 하지만 최근 미국 내 스테이블코인 규제 논의가 구체화되면서 일부 민간 발행 스테이블코인이 제도권 금융의 보완재로 기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도 무게가 실린다. 특히 미 재무부가 발행한 국채와 연계된 구조는 금융 당국이 우려하던 ‘자산 불충분 문제’에 일정 부분 해답을 제공한다. 기초자산의 안정성과 투명성이 뒷받침되는 만큼 달러 유통 인프라를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하기에 충분하다는 평가다.
다만 스테이블코인이 내포한 구조적 리스크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 또한 꾸준히 제기된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지난달 15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스테이블코인의 가격 안정성과 유동성 위험을 지적하며 “해당 자산이 금융 시스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의 조사 결과를 인용해 “2023년 1월부터 11월까지 USDC 등 주요 스테이블 코인의 ‘디페깅(가치 유지 실패)’이 600번 이상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실제 USDC 발행사인 서클은 실리콘밸리은행에 준비자산의 8%를 예금으로 맡겼지만, 해당 은행의 파산으로 1달러에 고정됐던 USDC 가격이 0.86달러까지 하락하는 등 대규모 인출 사태) 위기에 내몰린 바 있다. 이 같은 위기는 금융시스템 전반의 리스크로 확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우려를 낳는다. BIS는 “스테이블 코인에 35억 달러(약 5조원) 자금이 유입되면 단기 미국 국채 금리는 약 0.025~0.05%p 하락하지만, 반대로 동일한 규모의 자금 유출 시엔 금리 상승 폭은 0.06~0.08%p에 이를 수 있다”고 추산했다. 이는 하락 폭보다 최대 3배가량 높은 수준으로, 국채 가치의 폭락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고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스테이블코인을 디지털 결제 인프라의 핵심 축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미 규제당국이 조건부 수용 기조를 보이는 가운데, 민간 기업들의 진입도 꾸준히 늘면서 제도화 논의를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면서다. 국채 기반 모델을 선택해 가격 안정성과 법적 안전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불리시는 이러한 흐름의 전형인 셈이다. 향후 스테이블코인이 금융 시스템 내 안착할 시점은 아직 미지수지만, 과거 ‘투기성 자산’에서 ‘제도권 화폐 보완재’로의 인식 전환이 본격화했다는 점은 분명하다.